직원이야기
어느 봄날의 꽃 신발
소 명 순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화들짝 놀란 버들강아지 나뭇가지가 눈을 뜨고, 들판 아지랑이의 부드러운 입김이 머문 자리에는 노란 민들레가 방실거린다. 보내지 않아도 시간은 가고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그러한 계절변화의 진리 속에서 자연의 시간표대로 시계바늘은 오늘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나는 봄 처녀라도 된 양 지금 가슴이 설렌다. 그리고 아홉 해 동안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걸어가는 일터를 향하며 기도한다. 오늘 나의손길을 필요로 하는 어르신들이 내 손길에 의해서 아프지 않고 편안하시기를, 내 작은 목소리가 어르신들 마음의 안정을 드릴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들의 좌우명 ‘어르신 중심의 케어’ 에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다짐한다.
아름다운 것만 보고 평생을 살아오신 듯이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어르신의 피부가 눈부시게 하얗고 부드럽다. 백년이 넘는 세월을 사시면서 지치기라도 하셨는지 아니면 나이가 드셔서 아이가 되셨는지 지능이 5세정도 되시고 주로 침상에 계실 수밖에 없는 어르신, 어르신의 머리맡에 그동안에는 없었던 예쁜 꽃무늬 신발이 놓여있다. 이동해드릴 때마다 신겨 드리라는 인계와 함께 말이다. 누워 계시는 시간이 많고 걸음을 걸어본지가 언제인지도 알 수 없고 당연히 신발이라는 이름은 잊혀진지 오래일 터, 그런데도 불구하고 새로 부임해 오신 원장님께서 신발을 사다 드린 것이다.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러지 않아도 바쁜 직원들의 업무가 늘어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많아졌다. 식사 시간이 되었고 어르신을 침상에서 식당으로 이동해드려야 한다. 휠체어에 모시고 신발을 신겨 드렸다. “어르신 신발 신겨 드렸는데 기분 좋으세요?” 하고 말씀드리니 고개를 끄떡이신다. “누가 사다드렸어요?” 하고 물으니 “조합장님” 이라고 얼른 대답하신다. 조합장님 이라는 단어 속에는 여러 가지 뜻 담겨있다. 누군가 분명 나를 챙겨주고 보살펴 주는 사람 중에 책임자급이라는 의미와 그 사람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그로인해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무한한 행복함을 표현하신 듯하다. 원장님께서는 걷지도 못하시는 이 어르신에게 신발을 사다드릴 생각을 어떻게 하실 수 있었을까? 나는 가장가까이에서 어르신의 일 거수 일 투족을 보살펴드렸어도 그러한 생각은 하지 못 하고 그저 어르신의 몸이 불편하지 않도록 곁에서 돕는 것만이 진정한 케어라고 스스로 단정 지었었다. 그러나 봄꽃처럼 고운 신발을 신으시고 환히 웃는 어르신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동안 미처 헤아려 드리지 못했던 또 다른 부분을 발견한 듯 하여 어르신께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께서는 대 자연의 섭리에 따라서 그 자연의 시간표대로 오늘도 쉬지 않고 맥박이 뛰고 계시고, 104번째 맞이하시는 봄에 가장 아름답고 예쁜 꽃 신발을 선물 받으신 것이다. 얼마나 기쁘셨을까. 오래토록 신발을 신지 않으셨고 그대로 신발을 신어보지 못 할 수도 있었던 어르신께서는 원장님의 의미 있는 배려로 돌아가실 때까지 신발을 신으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에 없던 업무가 하나 늘었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진작부터 해야 할 업무를 이제부터라도 해드리는 것이라는 원장님의 말씀에 공감을 하면서, 어르신께 앞으로도 열심히 신발을 신겨 드릴 것을 약속드렸다.
퇴근시간 무렵 비가 내린다. 만물이 소생하도록 메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봄비가 내린다. 주인인 나를 기다리던 핸드폰을 열었다. 낯익은 전화번호가 부재중으로 여러 번 찍혀있었다. 친정어머니의 다급한 연락이었다. 연로하신 친정아버지께서 병원에 빨리 가셔야 할 상황이었다. 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119구급대의 도움으로 병원 응급실에 모셨고 각종검사를 거쳐 결과를 기다리며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정상적인 수면이 아닌 비정상수면에 빠져 혼수상태에 가까우셨던 아버지, 평소에 가지고 계신 지병과는 뭔가 다른 증세. 아버지께서 제발 별 일이 아니기를 바랐다. 검사결과는 체내에 저염분증으로 인해 신체리듬이 깨져서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진단과 함께 입원치료가 필요 하다고 하였다. 봄을 타시는지 입맛이 없다고 식사를 잘 안 하시더니 이러한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말씀도 어눌하시고 기력도 없으셨지만 다행히 치료를 받으시고 호전이 되어갔다. 치료가 더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집에 가자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셨다. 못 말리는 고집을 아무도 이길 수 없어 퇴원하여 집으로 모셨다. 전보다 치매도 더 진행 되시고 움직임도 더 불편하시고 심지어 배뇨배변 장애까지 보이셨다. 젊은 시절 천하에 무서울 것 없이 배짱 좋고 뚝심 있는 아버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인 쇠퇴를 받아들이지 못하시며 눈물이 많아지시고 “나 오래 못살 것 같다”라고 습관처럼 말씀하시고, 곁에서 어머니께서 보살펴드리는데도 불구하고 젊은 자식 누군가가 곁에서 늘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는 어리광쟁이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대쪽 같은 성격으로 성실하게 살아오신 아버지를 보며 성장한 우리 자녀들도 이를 본받아 반듯하게 성장했고, 언제 어디서든 제 몫을 다하며 주위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지내고 있음이 다 아버지의 덕분이라고, 움직임이 불편하셔도 말씀을 잘 못 하셔도,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의 보호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의 존재와 살아계심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해드렸다 아버지께서는 느리게 고개를 끄떡이시며 말씀하셨다.
“그래도, 내가 세상을 허투루 살지는 않았구나…….”
몸과 마음이 불편하여 무표정한 듯한 모습 뒤에서 희미하게나마 밝은 표정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오래된 꽃나무가 피워낸 혼신의 꽃 한 송이인 양 너무나도 환하여, 그만 울컥 젖어드는 감정을 참아내느라 공연히 함께 웃어보였다.
아버지의 여든다섯 번째 봄날이 참 화창하기도 하였다. 일광욕을 해 드리기 위해서 마당으로 모시며 아버지의 몸을 부축해드렸다. 한 걸음 두 걸음 발짝 옮기기가 그리도 힘드실까 천근이 되시는지 만근이 되시는지 무겁기만 하신 아버지의 발에 신발을 신겨 드렸다. 얼마나 이 신발을 더 신으실 수 있을까, 언제까지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85년 동안 걸음을 걸으셔서 투박해지신 발에 우리 자녀들은 열심히 신발을 신겨드려야 한다.
이제는 욕심도 의욕도 없으셔도 자식에 대한 애착만은 잊지 않으시고 매일 모습을 보여 주기를 원하시는 아버지는 어느 자식이 됐든 하루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신 모양이다.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사랑으로 키우셨듯이 이제 아버지께서는 젊은 우리 자녀들에게 사랑받을 일만 남아있고 아버지께서 하실 일은 식사 잘 하시고, 운동 열심히 하시는 것뿐이라고, 그래야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자식들과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고, 또 오늘 같은 봄을 앞으로도 여러 차례 더 맞이할 수 있다고 아버지께 주문하였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팔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구십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알아서 갈 테니 재촉 말라 전하라~
백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날 좋은 시에 간다고 전해라~
아버지께서는 듣고 계시면서도 안 듣는 척 하시려는지 밝은 원색 옷차림의 딸을 보시며 “우리 딸은 얼굴도 예쁘고 옷 때깔도 참 곱다”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는 푸르름이 더해가는 먼 산 쪽을 바라보고 계셨다. 평소와는 다르게 칭찬을 자주 하시고 “고맙다” “수고했다”라는 단어를 잘 사용 하신다. 먼 곳으로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은 인정하시면서도 남겨질 어머니와 자식들과의 이별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아버지의 길고 흰 눈썹도 같이 하늘거렸다. 아주 멀리서부터 날아온 이름 모를 꽃향기가 까닭 없이 반가운, 그런 따스한 어느 봄날이었다.
- 2016년 5월 논산시 효행수기 수상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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